🎬 영화 [히든 피겨스] 기본 정보
우주 개발의 역사를 말할 때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대개 우주비행사나 유명 과학자들입니다. 그 성공 뒤에서 수십 년간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히든 피겨스]는 그 빈자리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채워주는 작품이었습니다.
- 제목 :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 국내 개봉 : 2017년 3월 23일
- 감독 : 시어도어 멜피
- 출연 : 타라지 P.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 장르 : 드라마, 전기, 역사
- 러닝타임 : 127분
-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원작 : 마고 리 셰털리의 동명 논픽션 [Hidden Figures]
실화라는 사실이 주는 감동
저는 역사 기반의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현대의 실화 기반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앞서 리뷰했던 작품들을 돌이켜보니 현대의 실화 기반도 사실 좋아하는 편이었나봅니다. 이 영화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보고나서 비슷한 작품 없을까, 하고 찾다가 알게 되어 OTT로 관람하게 된 영화입니다.
게다가 영화를 다 보고난 후에 실제 인물들을 찾아보니, 이 영화가 얼마나 사실에 가깝게 만들어졌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캐서린 존슨은 NASA 랭글리 연구소에서 실제로 근무했던 수학자로, 궤도역학 분야의 핵심 계산을 담당했습니다. 궤도역학이란 우주선이 지구 주위를 어떤 경로로 비행할지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학문으로,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작업입니다. 실제로 존 글렌이 지구 궤도 비행을 앞두고 "IBM 컴퓨터가 아닌 캐서린의 계산을 믿겠다"고 요청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NASA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이 사실은 NASA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로시 본과 메리 잭슨 역시 실존 인물입니다. 메리 잭슨은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로, 영화에 나온 것처럼 법원에 직접 청원해 교육 기회를 얻어낸 이력이 실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사 영화는 실화를 극적으로 과장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실제보다 덜 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료를 찾아본 사람이라면 아마 비슷한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화가 단순히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라는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왜 이들의 이름이 오랫동안 역사에서 지워졌는지, 당시 구조적 차별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함께 보여줍니다. 구조적 차별이란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제도와 관행 자체에 차별이 내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단순한 감동 이상의 역사적 시각을 함께 얻게 됩니다.
차별의 일상을 보여주는 방식이 다르다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라고 하면 폭력적인 장면이나 극적인 갈등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장면들을 예상하며 다소 긴장한 채로 영화를 봤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캐서린 존슨이 중요한 계산을 하던 중 흑인 전용 화장실(Colored Restroom)까지 수백 미터를 달려가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흑인 전용 화장실이란 당시 미국 남부 지역에서 짐 크로 법(Jim Crow Laws)에 따라 운영된 인종 분리 시설을 가리킵니다. 짐 크로 법은 1960년대까지 흑인과 백인의 공공시설 이용을 법적으로 분리했던 제도로, 화장실부터 식수대, 대중교통까지 모든 것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거대한 폭력이 아닌 반복되는 작은 불편이 실은 얼마나 큰 차별이었는지를 말없이 전달합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특히 오래 멈칫했던 이유는, 그 달리기가 화가 나거나 억울해서가 아니라 그냥 매일 해야 하는 일처럼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게 더 무거웠습니다. 일상이 된 차별은 저항하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습니다.
알 해리슨이 흑인 전용 화장실 표지판을 직접 망치로 부수는 장면은 반대로 통쾌함을 줍니다. 이 장면은 영화적 각색이 일부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인종이나 성별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이 짧은 장면 하나에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차별이 일상으로 그려지는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캐서린이 매일 수백 미터를 달려 흑인 전용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던 현실
- 도로시가 팀을 실질적으로 이끌면서도 정식 관리자(Supervisor) 직책을 받지 못했던 관행
- 메리가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도 피부색을 이유로 엔지니어 교육 과정에 등록조차 할 수 없었던 제도
세 가지 모두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연출 방향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AI시대의 현대인으로서, 도로시 본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이유
세 주인공 모두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 도로시 본의 이야기가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캐서린 존슨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다 보니 도로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도로시는 IBM 메인프레임(Mainframe) 컴퓨터가 연구소에 도입되자, 자신과 동료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임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챕니다. 메인프레임 컴퓨터란 1950~60년대에 등장한 대형 중앙 처리 컴퓨터로, 당시에는 건물 한 층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했으며 수십 명의 인간 계산원을 대체할 수 있는 계산 속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평하거나 저항하는 대신 도로시는 도서관에서 FORTRAN(포트란) 프로그래밍 언어 책을 독학으로 익히고, 이를 동료들에게 가르칩니다. FORTRAN이란 과학 및 수치 계산에 특화된 프로그래밍 언어로, 당시 IBM 컴퓨터를 운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했던 기술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지금 우리에게 특히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불안해하거나 외면하기보다 먼저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메시지가, 60년 전 이야기임에도 조금도 낡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WEF)의 보고서에 따르면 AI와 자동화로 인해 향후 5년간 약 8,500만 개의 일자리가 대체되고 9,700만 개의 새로운 직종이 생겨날 것으로 예측됩니다. 도로시가 1960년대에 이미 그 해답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메리 잭슨의 이야기도 해볼까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포기하는 대신 법원을 직접 찾아가 판사를 설득하는 장면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제도의 벽을 실력과 논리로 허무는 과정처럼 보였습니다. 세 사람 모두 방식은 달랐지만, '실력으로 증명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 점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히든 피겨스]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게 됩니다. 그게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가장 큰 효과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감동적이었다는 감상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 차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억지 눈물 없이 희망으로 마무리 짓는 영화가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수학이나 우주에 관심이 없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습니다. 보고 나서 달라지는 게 있다면, 그게 좋은 영화의 증거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