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기본 정보
영화관을 나서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난 뒤가 딱 그랬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라는 말만 믿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완전히 다른 감정을 안고 나왔습니다. 멀티버스 액션을 기대했는데 결국 가족 이야기에 눈물이 나고 말았지요.
- 제목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개봉일 : 2022년 10월 12일 (한국)
- 장르 : SF, 액션, 코미디, 드라마, 판타지
-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다니엘스)
- 출연 : 양자경, 키 호이 콴, 스테파니 수, 제이미 리 커티스
- 러닝타임 : 139분
-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국가 : 미국
정신없는 시작,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날까
혹시 영화를 보다가 "이게 대체 뭐지?" 싶은데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던 경험,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 초반 30분이 딱 그랬습니다. 화면은 1초 단위로 바뀌고, 새로운 우주가 숨 쉴 틈도 없이 튀어나오고, 황당한 유머까지 겹쳐서 솔직히 처음에는 방어적이 됐습니다. "이게 진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냥 어리둥절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이민자 에블린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세금 문제, 치매 기미가 보이는 아버지, 멀어지는 딸과의 관계까지 겹쳐 삶이 점점 무너져가는 평범한 중년 여성입니다. 그런데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던 날, 남편 웨이먼드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여기서 영화의 핵심 개념인 버스 점프(Verse Jump)가 등장합니다. 버스 점프란 다른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자신의 기억과 능력을 현재의 몸으로 끌어오는 기술을 말합니다. 셰프가 된 에블린, 무술의 달인이 된 에블린, 영화배우가 된 에블린 등 수십 개의 삶이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이 빠른 전환이 혼란스럽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혼란 자체가 에블린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감탄한 건 멀티버스(Multiverse), 즉 동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평행우주라는 개념을 단순한 SF 설정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멀티버스란 물리학에서 우리 우주 외에 무수히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적 개념인데, 이 영화는 그걸 "내 인생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으로 저의 생각을 이끌어냅니다. 그 순간부터 이 이야기는 SF가 아니라 제 이야기가 됩니다.
양자경과 키 호이 콴,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배우들을 빼놓는 건 불가능합니다. 혹시 양자경이라는 배우를 잘 모르셨던 분들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전 세계가 극찬했는지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데, 같은 인물인데 우주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눈빛 하나, 어깨의 기울기 하나가 다릅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허무주의(Nihilism)를 상징하는 딸 조이의 캐릭터입니다. 허무주의란 삶에 본질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보는 철학적 태도를 뜻합니다. 조부 투파키라는 존재로 변한 조이는 모든 우주의 기억을 동시에 가진 결과 "어차피 다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스테파니 수가 이 역할을 연기하는 방식은 단순히 악당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정받고 싶었던 딸의 모습이 내내 보여서 훨씬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진짜 숨은 주인공은 웨이먼드라고 생각합니다. 키 호이 콴이 연기하는 웨이먼드는 겉으로 보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남편입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액션 장면보다 훨씬 강하게 남습니다. 힘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친절과 이해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는 그 대사를 들었을 때, 조금 의외였습니다. 멀티버스 액션 영화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이 영화가 받은 상들을 보면 배우들의 연기가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7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양자경은 여우주연상, 키 호이 콴은 남우조연상, 제이미 리 커티스는 여우조연상을 각각 받았습니다. 아카데미 공식 수상 기록은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영화에서 연기 부문 3관왕이 나온 건 그만큼 배우들의 시너지가 작품 전체를 받쳐줬다는 뜻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멀티버스 소재 영화들을 여러 편 봤는데 대부분 스케일 경쟁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 작품은 예산이 훨씬 적었음에도 연출의 창의성으로 압도적인 밀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답이 보입니다.
이 영화를 두 번 볼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영화, 처음 보고 나서 모든 걸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혹시 첫 관람 이후에도 자꾸 장면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셨나요? 저도 일주일 뒤에 다시 봤는데,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 영화가 이중 구조로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비평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 작품은 장르 혼종성(Genre Hybridity)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례입니다. 장르 혼종성이란 하나의 작품 안에 서로 다른 장르의 문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연출 전략을 말합니다. SF, 액션, 코미디, 가족 드라마가 한 장면 안에 뒤섞이는데, 놀라운 건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섞임 자체가 에블린의 인생처럼 느껴집니다.
재관람을 권하는 이유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초반부에 지나쳤던 복선들이 후반부와 연결되는 순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탁소 영수증 하나, 구글 눈 스티커 하나도 이유 없이 등장하는 게 없습니다.
- 처음에는 코미디로 보였던 장면이 두 번째에는 슬프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조이와 에블린의 초반 갈등 장면이 그렇습니다.
- 웨이먼드의 대사 하나하나가 영화 전체의 철학적 메시지와 연결된다는 걸 재관람 때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 손가락이 소시지인 우주처럼 황당하게 느껴졌던 설정들이 실은 감정선을 위한 장치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철학적으로 분류하면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 허무주의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철학적 관점을 뜻합니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리지만,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그 허무 앞에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택합니다. 이 대비가 영화의 진짜 결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평점 9.5점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화입니다. 화려한 볼거리만 기대하고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생각나는 영화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보거나, 오래된 관계에 지쳐있을 때 보면 더 깊이 와닿을 것 같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딱 한 가지만 생각하고 보러 가시면 됩니다.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질문 하나면 충분합니다.
